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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2. 12世 〉20. <태사공>증가선대부휘경효묘갈명(贈嘉善大夫諱景孝墓碣銘)
1. 문헌 목록 〉12. 12世 〉22. <태사공>념수재기(念修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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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태사공>목사공유성비명(牧使公惟誠碑銘)
<태사공후>목사공유성비명(牧使公惟誠碑銘) 淳昌之趙自麗時顯有諱玻階為金紫光祿大夫官為門下侍中勳為上柱國君其後也君諱惟誠字仲實曾祖安陰縣監訓導勣教祖和陵參奉諱玉汝父上舍諱壽億上舍娶同郡處士趙球女嘉靖丙戌三月癸已君生始周碎出鞠外家自幼沈默寡言為處士所重戊申丁上舍憂時君年甚少凡喪制一遵文公家禮見者磋異上舍隱德不仕以君之賢人知其家學有日也君生益壯學益進文譽日播乙卯春中司馬連擢甲科内叙為尚衣院直長漢城府參軍成均館典籍司藝司成承文院校檢校理歷户禮刑工四曹佐郎再入工曹為正郎奉常寺判官僉正司諫院正言獻納司憲府監察持平掌令兼帶司官者三外叙為長城縣監魚川察訪慶尚道都事昆陽古阜錦山郡守羅州牧使是君平生履歷之大都也君性廉謹自守家人生業泊然不以為意而至於遇人之急必為之悉力經理乃己族人之貧不能嫁且葬者多仰君以濟焉待親舊盡其誠款人無以怨言至者或有非意相干君未嘗顯於色雖遇其人略無他 異論者以此益多君君以監察充書記如京師會上价道死君能周旋以禮且還無關事人稱其卜居臺閣論事不撓謇然有直聲以母夫人老為養屢乞外人皆以為屈而君有捧檄之喜所至多去後思在錦山九閱月而母夫人不幸君久嬰沈察重以過毀轉輾一朞病己不可為矣而猶以時事為愛至形於筆札聞者悲之未幾 染疫與還外寝疾革侍者請曰內子願一訣君己瞑目忽曰得正而斃焉斯可矣引陳壽使婢丸藥事責之竟不許俄而君逝矣實 萬曆三年四月辛未也年五十君有大哭識與不識間咸悼惜焉其年九月丁酉葬于宅南朋砧坐某原附先人也君先娶海州吳氏後娶順天朴氏幷無后噫天之服施善人何居君葬之明年丙子春君之外舅命星請余銘 銘曰伏枕憂國屬纊遠嫌所養之深 此亦可占有隆者邱在宅之南從先瑩葬如寐斯甘 霧峰 高敬命 謹撰 목사공유성비명(牧使公惟誠碑銘) 순창조씨는 고려국에서 현달하여 휘 여(興)가 금자 광록대부 벼슬이 문하시중에 훈 공으로 상주국이 되였으니 군은 그 후손이었다. 군의 휘는 유성(惟誠)이요 자는 중실 (仲實)이며 증조는 안음현감훈도 적교(勣敎)고 조는 화릉참봉 휘 옥녀(王汝)요 고는 상사 휘 수억(壽億)이며 비는 처사조 구(球)의 녀였다.一五一六(嘉靖丙戌)년 三월 계 사(癸巳)에 군이 출생하여 돌지낸 뒤부터 외가에서 컷다. 어려서부터 침묵하여 말이 적으니 처사공이 애중하였고 무신(戊申)년 상사공 초상때 군의 나이 작으나 무릇 집상예제를 주자가례를 따르니 보는자 찬탄하고 상사공이 덕을 숨기고 벼슬아니하였음으로 군의 어짐이 가정학문이 있는 때문이라 말하였다. 군이 신체가 장대하고 학업이 날로 진취하니 을묘(乙卯)년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련해서 갑과(甲科)에 올라 내직으로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 한성부참군 성균관전적 사예 가성 승문헌고검 교리 호조 예조 형조 공조 四조좌랑을 지내고 두번 공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으며 몽상시판관 첨정 사간원정언 헌납 사헌부감찰 지평 장령 겸하여 사관(史官)을 세번 지내고 외직으로 장 성현감 어천찰방 경상도도사 곤양고부 금산군수 나주목사를 지냈으니 이것이 군의 평생 이력의 대강이었다. 군이 성품이 청렴하고 삼가 가히 스스로 지켜 집사람 생업이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사람의 급란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휼하며 족내가 가난하여 가취(家娶)와 장사를 못하면 때를 잃지 않게 도와주고 친구를 성의를 다하여 대접 하니 사람의 원망한 말이 없고 오는 자가 혹 글은 뜻이 있어 서로간 섭하되 군이 일찍 안색에 나타내지 않고 비록 그 사람을 만나도 다른 말을 아니하니 이로써 더욱 어진 군자라 하였다. 군이 감찰로써 서기가 되어 서울에 가다가 웃사신과 길에 모여 일을 마치며 예로써 주선하고 또 돌아와서 궐한일이 없으니 사람이 그 가려산것을 칭송하였고 대각(臺閣)에서 일을 의론할 때 흔들리지 않고 떠듬거리며 곧은 소리가 있었다. 늙은 모부인을 봉양기 위하여 자주 외직을 구하니 사람이 다 친굴(親屈)함으로써 격문을 받은 기쁨이 있다 하였다. 일은 곧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있고 금산재임 九개월에 모부인 이 불행하였으며 군이 또 병을 붙들었는데 거듭 지나친 애통으로써 1년을 끄니 병이 나을 가망이 없으나 오히려 시사로써 근심하여 서찰사이에 나타나니 듣는 자 슬퍼하였다. 얼마 안되어 또 역질에 걸려 손수레로 외사(外舍)에 돌아와 병이 침중하니 부인이 대하여 영결하기를 원하더니 군이 이미 눈을 감고 문득 가로되 몸을 바르게 가지고 죽는 것이 옳다 하며 이윽고 별세하니 수는 五十세요 때는 一五七五(萬曆三年) 四월 신 미(辛未)였다. 군이 큰 그릇이라 알고 모르고 간에 다 슬퍼하고 아깝다 하였으며 그해 九월 정유(丁酉)에 붕침 선고 묘하에 장사하였다. 전배 해주오씨 계배 순천박씨가 다 무후하니 아! 하늘이 착한 사람에 보시가 이와같은 고군을 장사하고 명년 병자(丙子)에 군의 외구(外舅) 명성(命星)이 내내 갈명을 청하므로 새겨 가로되 베개에 엎드려 나라를 근심하고 운명을 멀리 의심하였다. 伏枕憂國屬纊遠嫌 길은 바가 깊어 이를 또 가히 점하였다. 所養之深此亦可占 언덕에 높이 있는 자는 택지의 남쪽이로다. 有隆者邱在宅之南 선영을 쫓아 장사하니 이에서 달에 잠들지어다. 從先瑩葬如寐斯甘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근찬(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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